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문단 편집) == 사제로서의 비오 == [[파일:mtGSbND.jpg]] 사진은 성혈을 축성하는 비오 신부 프란치스코는 1910년에 [[성품성사|사제품을 받았고]], 수품 4일 후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징병 시절]]을 제외한 일평생 동안 피에트렐치나에서 살았다. 사제로서 그는 매우 엄격했는데, 일례로 그는 [[고해성사]] 때에 거짓말을 하는 신자는 내쫓고--사실 다른 신부들도 고해자가 거짓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면 당연히 내쫓겠지만, [[독심술|비오 신부는…]]--, 죄를 지어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 또 같은 죄를 지어 또 [[고해성사]]를 보려고 하는 경우에는 '''"같은 죄를 한두 번은 사해줄 수 있지만, 3번째부터는 주님이 흘리신 거룩한 피에 모독이 될 수 있어요!!"'''라고 --역정--말하며 사죄경을 외워주지 않았다. 비오 신부는 매주마다 같은 죄를 지어서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신자에게는 사죄경을 외워주지 않았고, 40년만에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본 신자에게는 사죄경을 외워준 적이 있다. 사실 다른 사제들도 이럴 수 있긴 하지만, 지금도 그때도 잘 이러진 않았다. 비오 신부도 자기 방식을 다른 신부들에게는 추천하지 않았다.[* 애초에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듣고 나서 사죄를 해주고 나면 대부분 잊는다고 한다.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 위한 면이 크다.] 거의 같은 시기, [[이탈리아]] 파도바의 카푸친회 수도원에 있던 '헤르체그 노비의 성 레오폴도(1866-1942)' 신부는 언제나 매우 온화하고 자상하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으며, 또한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발휘하여 역시 명망이 높았다. 성 레오폴도는 신자들에게는 일부러 매우 관대한 보속을 주고, 대신 자기가 고백자들의 몫까지 기도하고자 하였다. 레오폴도 신부는 비오 신부와 동시대를 살았고 먼저 시성되었지만, 생전에 두 사제가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똑같이 [[이탈리아]]에서, 똑같이 카푸친 수도회 소속이었으므로 서로 이름은 전해들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신자들이 오상의 성 비오 신부에게 "파도바에 계신 레오폴도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언제나 온화하고 따뜻하게 주신다는데, 왜 비오 신부님은 그렇게 호통도 잘 치고 하시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비오 신부가 "레오폴도 신부님이 골때리는 고백자를 만나면, 보속으로 저한테 보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물론 진짜로 그랬다는 소리는 아니고 농담. 성 레오폴도 신부가 생전에 한 말에 이런 것이 있었다. ''' "어떤 사람들은 제가 고백자들에게 너무 너그럽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넘습니다."''' 이는 똑같은 수도회에 몸담은 성직자들이었지만, 개인적인 삶 속에서 추구한 영성의 초점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 또한 비오 신부는 [[미사]]를 집전할 때도 기도문 하나하나에 빠져들며 집전했기에, 미사 1대당 무려 3시간(!)이나 걸려 집전했다고 한다. 스스로 고행을 하였으며, 돌베개와 돌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1968년 9월 23일에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피에트렐치나의 모든 신자들이 모두 울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